대레협

대만이레 연교1

by 강남구 금성무 2024. 8. 18.

@sshuuu_u 님 연성교환 받은 작업물

 

 

정대만이 돌아왔다. 허이레와 정대만의 열아홉의 일이다. 허이레가 이걸 알게 된 건 북산고 전체에 정대만이 농구부에 복귀했다는 소문이 퍼질 때쯤이었다. 정대만을 따라 북산고에 입학해 놓고도 일학년 때 이후로는 한참을 잊고 있던 그 이름이 학교에서 들려올 때, 허이레는 그의 이름을 입안에서 잠시동안 굴려보았다. 정대만이라니. 그 정대만이 다시 돌아왔다니. 조금은, 아니 꽤나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직접 진위 여부를 확인해 봐야만 정대만이 농구를 다시 한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허이레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정대만이 거기 있으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정대만은 흔한 이름은 아니었으나 북산고에서 종종 헛소문으로 들려오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정대만이 폭주족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그에 대한 관심을 딱 끊은 지 오래였지만 허이레는 저도 모르게 좀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그에 대한 사랑이라기엔 아니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팬으로서 기대하는 마음 조금. 딱 그 정도는 허이레의 마음속 어딘가 쯤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체육관 문을 열었을 때, 허이레의 눈에 보인 건 믿기지 않는 광경이자 소문의 실체. 정대만이었다. 열일곱 그때와 딱히 다를 게 없는 정대만. 농구 코트를 뛰어다니는, 농구를 사랑하는. 허이레가 가장 사랑하던 모습의 정대만. 너무 당황해서였는지 아니면 감격이었는지 모르겠다. 뭔지 모르겠는 감정이 허이레를 휩쌌다.
 
그저 얼빠진 채로 정대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참 공을 잡고 코트를 누비던 정대만이 뒤를 돌아봤다. 저를 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테지만 그와 마주쳤다. 허이레가 한참을 따라다니던 그 익숙한 얼굴이 돌아보며 허이레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제가 사랑하던 호쾌한 미소. 이걸 여기서 다시 마주할 줄은 몰랐는데, 그걸 다시 마주한 순간의 기분은 꽤나 신기했다.
 
그러면서도 정대만과 저의 과거가 조금 떠올라서 허이레는 쓴웃음을 삼켰다. 고백하던 그 순간의 공기마저도 생생해서. 부상당한 모습의 정대만을 찾아간 건 아마 실수였을지 몰랐다. 그는 이미 혼자서도 많이 상처받은 상태였을 테니까.
 
고백의 말을 건네며 농구를 다시 하기 위해 돌아오라고, 그런 너를 많이 사랑해서 이 학교까지 오게 됐다는 말을 하는 제게 심한 말을 뱉고는 쌩 돌아서 가는 정대만의 뒤통수. 그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를 피하기 위해 체육관 근처도, 양아치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발도 딛지 않았던 나날들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런 정대만이 다시 돌아왔다니. 그를 피해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만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유일하게 남았던 피아노마저 관둬버린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정대만이 돌아왔다면 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가 아닌가. 허이레는 이렇게 생각했다. 전교 1등이 되었다지만 그게 제 자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농구를 너무 사랑해서 결국에는 농구로 다시 돌아오게 된 양아치. 이런 정대만을 가리키는 키워드들을 듣다보니 허이레는 순수하게 피아노를 치고 정대만을 좋아해 북산고까지 오게 된 제 자신이 조금은 그리워졌다.
 
북산고의 연습 경기가 끝날때까지도 허이레는 결국 경기에는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돌아온 정대만에 대한 생각, 그리고 허이레 자신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복잡한 머리와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체육관을 나서고 있는 그 때, 허이레의 어깨 즈음을 누군가 톡. 치는 게 느껴졌다.
 
돌아봤을 때 허이레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언제나처럼 시원한 웃음을 보이고 있는 정대만이었다. 안녕 허이레. 오랜만이야. 여전한 그 얼굴, 미소. 따뜻한 목소리의 정대만이 저에게 손을 흔드는 그 모습에 허이레는 마치 다 잊고 과거로 돌아가게 되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였다. 허이레가 다시 정대만을 사랑하게 된 건. 다시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허이레는 단 한 번도 정대만을 미워한 적은 없었으니까. 탈선을 했다고 해도. 그렇게 사랑하던 농구를 그만뒀다고 해도. 저의 고백을 잔인하게 거절했다고 해도. 허이레는 정대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이레에게 정대만은 열네 살부터 그 이후의 모든 기억이었고, 제가 처음으로 주체적으로 사랑하게 된 무엇이었으니까.
 
정대만이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건넨 바로 그날에, 허이레는 정대만의 탈선 이후로 꽤나 오랫동안. 방 안 구석에 집어넣고 꺼내 들지도 않았던 캠코더를 꺼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제가 가장 열성적이었던 시절을, 그 속의 패기 넘치는 정대만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캠코더를 집어 들었다. 정대만이 농구를 다시 시작했고, 정대만을 열렬히 사랑하던 그 시절의 허이레 또한 복귀했다. 열아홉이다.
 
가만히 캠코더를 들여다보던 허이레는 자신에게 제삼자가 되어 질문을 던졌다. 만약 정대만을 보는 것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는가?라고 묻는다면 허이레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탈선했던 그에게 실망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대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이해했다. 뭐 어쨌든 간에, 어떤 모습의 정대만이 든 간에, 허이레는 정대만을 사랑했으니까.-허이레의 사랑은 연애적, 성애적 감정과 그를 응원하는 순수한 사랑을 모두 포함했다.-
 
하지만 그중의 최고를 고르자면 이것 또한 고민조차 하지 않고 경기를 뛰는 정대만을 보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허이레에게는 한없이 광활해 보이기만 하는 코트를 누비는 정대만. 14번이 박혀있는 정대만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순간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으니까. 정대만의 복귀는 곧 허이레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정대만을 따라다니는 동안에는 늘 손에 익어있던 캠코더를 놓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정대만이 복귀한 후에 치러지는 첫 번째 다른 학교와의 경기는 북산고 체육관에서였다. 항상 들고 다니던 캠코더, 정대만의 번호가 박혀있는 유니폼과 제 몸집만 한 플랜카드. 그 시절의 허이레가 돌아왔다는 걸 북산고의 경기를 쭉 지켜봐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북산고 벤치에서도 허이레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듯 했다. 야 대만아. 너 응원하는 걔도 돌아왔네. 채치수가 정대만에게 이런 말을 꺼내자 정대만이 관중석을 올려다봤다. 익숙한 그 얼굴이, 불꽃남자라는 조금은 쑥스러운 수식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플랜카드에 써서 저를 카메라에 담고 있는 허이레가 보였다. 항상 느꼈다지만 허이레가 오는 날에는 저를 열렬히 응원하는 누군가가 뒤에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뭔지. 더 힘을 내서 뛰게 되었다. 그럼에도 정대만은 그게 사랑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조금은 간질거리고 그가 느끼기에는 꽤나 낯부끄럽기만 한 감정을 정대만이 깨닫게 되는 것은 조금 더 뒤의 일이다.
 
뻔한 클리셰처럼 복귀전의 정대만이 혼자 30점을 꽂아 넣고 자신의 귀환을 모두에게 알리는, 그런 경기는 아니었다. 농구를 쉬었던 것의 여파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허이레가 조금은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점은 정대만의 그 자세였다. 투지가 불타오르는 눈. 지친 몸을 이끌고서라도 백코트해 제 역할을 다하려는 정대만. 정신력으로 뛰는 와중에도 공을 받으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석 점포를 쏘아 그물을 스치는 소리가 나고 스코어보드에 점수가 띠링. 울리는 순간에는 주먹을 불끈 들어 올리는 정대만의 그 땀방울에 섞여있을 투지가 좋았다. 그 순간의 정대만이 짓는 미소가,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가, 웃고나서도 백코트하며 뛰어가는 그 뒷모습이 좋았다. 제가 좋아하던 그 정대만이 돌아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뒤의 경기들에서는 정대만의 열띤 연습의 효과가 보이는 듯했고, 아무래도 허이레는 정대만을 또 한 번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들을 캠코더에 담는 모든 순간마저 사랑이었다. 허이레의 사랑은 정대만에게는 늘 넘쳐흐르기만 했다. 정대만도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허이레의 저를 향한 열렬한 사랑이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러웠고, 익숙해졌을 때는 제 팬이 늘 지켜보고 있다는 그 사실이 조금은 우쭐했고, 계속 볼수록 그런 열정이 고마워졌다. 정대만은 꼭 허이레가 못 오는 날이면 컨디션이 나빠지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허이레를 생각하면 정대만의 머리에서는 늘 여러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가슴속 무언가가 들끓는 게 느껴지는데도 그게 무슨 감정일지는 잘 모르겠다, 뭐 그 정도의 생각만으로 제 마음을 가볍게 치부했던 것도 있었다.
 
정대만이 그 들끓던, 허이레를 향하고 있는 제 낯부끄러운 감정을 깨달아버린 건 결국, 그가 복귀한 지 몇 달이나 지나고 나서였다. 잔인한 말로 널 싫어한답시고 밀어냈던 걔를 좋아하고 있다니. 나를 계속해서 응원해 주는 걔의 모습이 고맙기만 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그 애를 사랑하고 있었다니. 정대만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허이레를 좋아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애의 진심을 잔인하게도 짓밟았던 전적이 있는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실 정대만은 돌아오면서도,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저의 존재가 돌아오는 것이 환영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비겁하게 도망쳤던 저였다. 그렇게 사랑하는 농구마저도 버리고 도망친 비겁한 겁쟁이일 뿐이라도 생각했는데. 기대하지도 않았던 얼굴이 저를 마주하고 있었다. 여전히 정대만의 등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 여전히 캠코더를 통해 정대만을 담으며 미소 짓는 그 표정. 순수하게 무언가를 사랑할 줄 아는 웃음. 정대만이 농구를 사랑하는 것만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정대만을 사랑해 주던 허이레. 걔의 존재가 정대만에게는 생각보다 컸나 보다.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저를 지켜보고 있는 그 익숙한 모습에 정대만은, 제가 했던 심한 말도 모조리 까먹어버린 채 그 어깨를 두드리고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가 사랑이었을 텐데. 정대만은 그 당연한 사실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았다.
 
제 깊은 사랑을 자각하고 나서부터. 정대만은 허이레만 보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학교를 돌아다니다가 어쩌다 마주쳤을 때에는 몸이 굳어버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경기를 뛰는 와중에도 저를 찍고 있는 허이레가 눈에 밟혔다. 내가 어떤 꼴로 나오고 있을까, 완전히 별로인 건 아닐까. 혼자 생각하다가 멍 때리는 것처럼 보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닐 테 였다. 백코트 하던 채치수가 그 큰 손으로 제 등짝을 후려갈겨 정신이 번쩍 들게 했으니 망정이지. 어쨌든 간에. 정대만은 나사하나 빠진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낯부끄러운 사랑에 빠진 열아홉은 바보가 됐다.
 
허이레의 눈에 보이는 정대만이 요새 이상했다. 자꾸 제 캠코더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경기에서 멍 때리는 것처럼 구는 게 몇 번을 반복됐다. 허이레는 그게 제 캠코더를 마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복귀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정대만이 오랜만의 농구가 조금은 힘에 부쳐서. 그래서 관중석을 바라보며 힘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더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냥 비싸고 예쁜 선물을 얼마든지 사줄 수 있는데도 제가 직접 초콜릿을 만들어 포장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너만을 생각하며 만든 초콜릿. 그게 정대만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길. 원동력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냥 사물함에 넣어두고 몰래 나오려고 했는데, 정대만의 교실 뒷문을 열려는 순간에. 드르륵. 쿵. 교실 문을 열고 나온 누군가와 부딪히는 허이레. 위를 올려다보니 마주하게 된 건, 당연하게도 정대만이었다. 정대만도, 허이레도 순간 얼어붙었다.
 
어….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정적을 깬 건 정대만의 질문이었다. 망설이던 허이레의 결심. 마주친 김에 직접 전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에서였다. 요즘 지쳐 보이길래.. 그래서 너 응원하려고 만들었어. 사물함에 놓고 가려고 했는데, 마주치게 됐네. 항상 응원하고 있어 대만아. 알지? 이거 먹고 힘냈으면 좋겠다. 떨리는 목소리로 할 말을 전달한 허이레가 뒤를 돌아 발걸음을 떼려는데, 하얀 손목을 붙잡는 온기가 느껴졌다. 허이레의 긴 생머리가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다시 뒤를 돌았다.
 
떨리는 손의 정대만. 목을 가다듬는 헛기침 두 번. 그때 네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그때 나한테 농구 다시 하자고 했던 말… 결국 나 지켰다. 농구 다시 해. 너도 알고 있듯이. 여전히 붙잡힌 손목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채로. 허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통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아,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머리가 정리됐는 데 입이 떼지지를 않았다. 망설이는 것처럼 굴게 됐다. 나도.. 나도 너 좋아하는 것 같다고 허이레. 같은 게 아니라 네가 좋아. 그러니까 네 마음이 아직도 같으면. 나를 선수로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나 만나볼래.
 
그 담백하지만 묵직한 질문. 허이레가 어떻게 정대만을 선수로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자연스레 저도 모르게, 수줍게 웃게 됐다. 빨개진 귀를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이거… 긍정의 표시지. 정대만이 되물었다. 뭘 그런 걸 물어 대만아. 대답과 함께 정대만의 두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긴장해 땀으로 축축해진 손이 손목에서 스르륵 내려갔다. 허이레의 손가락에 얽히는 축축하면서도 단단한 손이 느껴졌다. 돌고 돌아서 이루어진 둘의 열아홉 무렵의 사랑은 딱 지금같은. 단단하지만 때로는 축축한 진심이 담겨있는 그런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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